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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에서

 
2003년 4월 15일 새벽 3시, 필자를 비롯한 본사 기자 3명과 인도 기자, 현지 가이드 2명은 쿠웨이트 국경을 넘어 이라크 입국을 감행했다.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로 향하기 위한 것이었다.
포탄으로 온 거리와 건물들이 폐허로 변한 국경마을을 넘어설 때, 사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하는 생각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갔다. 고백하건데 개인적으론 너무도 가고 싶지 않은 곳, 바그다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은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라크 남부에서 한국 기자들이 봉변당하는 것을 무수히 보아왔고 치안 부재의 상황에서 죽었다가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던 터라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더구나 쿠웨이트보다 치안 여건이 좋다는 요르단에서 한국의 기자들이 국경을 넘어 이라크 바그다드로 속속 들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ꡐ나도 기자야, 그러니 나도 국경을 넘어야지ꡑ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ꡐ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나ꡑ 하는 후회도 밀려왔다.
서울로부터 회사의 지침을 기다리기엔 상황이 너무나 불가피했다. 그 때까지의 회사 지침은 ꡐ안전을 고려해 별도의 회사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바그다드 진입을 시도하지 말라ꡑ는 것이었다. 그러나 쿠웨이트에 온 지 3주가 넘어가는데 계속 이라크 남부 바스라 지역에서만 취재를 하고 전쟁의 핵심 현장인 바그다드를 빼놓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건 기자로서의 직무유기였다. 운명이랄까, 필연이랄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이라크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새벽 3시, 부스스한 눈으로 지프차에 몸을 실었다. 아직 여명에도 이르지 못한 시간, 사방은 컴컴했다.
쿠웨이트 국경을 채 넘기도 전에 미해병대 헌병들이 우리를 제지했다. 우리는 ꡒ이미 쿠웨이트 정부로부터 국경 통과 허가서를 발급받았다ꡓ고 말했지만 연합군 병사들은 안전 문제를 내세우며 국경을 넘을 수 없다고 가로 막았다.
이른 새벽 동 트기 전에 출발해야만 이라크 주민들과 조우하지 않고 바스라를 거쳐 바그다그까지 겨우 다다를 수 있을텐데 국경을 통과하기도 전에 이들에게 가로 막히다니. 그저 막막할 뿐이었다. 한참동안 승강이를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동쪽 저만치에서 이미 해가 떠오른 뒤였다.
우리는 애초 약속대로 차에 기름 넣는 시간 말고는 쉬지 않고 바그다드로 가야만 했다. 주민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달리고 달렸다. 이라크 남부를 통과하니 주변 곳곳으로 야자수 숲이며 강물들, 양 떼와 소 떼가 펼쳐졌다. 정말, 다른 중동지역과는 사뭇 다른 비옥한 땅이었다.
바그다드행 중간 중간에서 미군 보급부대 행렬과 마주칠 때면 맘 놓고 그들을 다시 추월했고 기름이 떨어질 때면 너른 벌판 한가운데에서 급유를 했다.



출발한 지 15시간이 지난 오후 6시경. 드디어 티그리스강과 바그다드의 검게 불탄 도시 건물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릴 적 늘 꿈꿔왔던 상상의 도시, 신밧드의 모험, 하늘을 나는 양탄자,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이야기의 주무대를 만난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멋진 낭만의 공간이 아니라 처절한 전쟁터. 매케한 내음이 도시 전체에 깔려 있었고, 10여군데의 하늘은 연기로 짙게 뒤덮여 있었다.

어렵게 전세계 기자들이 몰려있는 팔레스타인호텔에 들어온 것은 컴컴함 밤이 넘어서였다. 하지만 첫날 밤엔 방이 없어 인근 쉐라톤호텔 로비와 차 안에서 쪼그린 채 눈을 붙여야했다.
전기와 모든 통신 수단이 끊겨 비상 발전기로 켜지는 몇몇 조명을 제외하곤 도시 전체가 암흑이었다. 때론 가까이서 때론 멀리서 밤새도록 귓전을 때리는 총소리, 그 사이 사이 들려오는 포탄 소리. 며칠 지나니 이것 또한 자장가처럼 느껴져 두려움조차 무디어졌지만…. 나중에 안 일이지만 총성은 대부분 알리바바라 불리는 도둑 떼들과 이들을 방어하려는 주민들간에 벌어진 총격전 소리였다.


다음날,후세인 대통령궁에 들어갔을 때 석상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후세인의 얼굴상이 정확한데 이순신 장군처럼 투구를 쓰고 있는 거대한 석상이 4개나 궁 앞에 있었다. 바로 함무라비 장군을 본 딴 후세인상이라고 했다. 이것만 보아도 이 나라가 후세인에 의해 결국 이렇게 망가졌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다. 북한에서 개인 우상화를 배웠다는 소문이 그럴듯 해 보였다. 대통령궁 뿐만 아니었다. 바그다드 도시 전체는 후세인 초상화와 동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그다드 주민들의 표정은 죽어있는 사람의 무기력 그 자체였다. NO AMERICA NO SADAM!. 거리에서 들여오는 이러한 외침이 바그다드 보통 시민들의 솔직한 심정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전쟁 전엔 전장으로 떠나는 남자들이 결혼하느라 축제 아닌 축제의 도시가 되었다던 바그다드. 그 도시가 이젠 수많은 젊은이들의 죽음이 넘쳐나는 장례와 유령의 도시로 변모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모두가 알리바바가 되어 무참한 약탈이 자행되는 광기의 도시로 변했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처연한 정글의 법칙이었다. 힘 있고, 머리 빠른 자만이 험난한 땅에서 살아날 수 있는 잔인한 법칙이었다.
인류 최고의 고대 문명을 꽃 피웠던 이라크. 이곳은 지금 미영 연합군의 어설픈 세계평화 기치 아래 무참히 짓밟혔다. 이라크인들의 자존심은 외국인이 보아도 연민의 정이 느껴질 만큼 땅에 떨어졌다.
바빌론에서 기자를 안내했던 가이드는 바그다드대학에서 고고인류학을 전공한 어엿한 고고학자였다. 그러나 후세인 치하에서 3달러짜리 월급쟁이 인생으로 전락했고 먹고 살기 위해 가이드를 부업으로 삼게 됐다고 했다. 조국 이라크의 문화 유적이 자신의 눈 앞에서 무참이 파괴되는 것을 지켜봐야했던 그 젊은 가이드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참으로 잔인한 전쟁이었다.

이번 전쟁은 저 먼 중동의 한나라에 벌어진 것이었지만 결코 우리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었다. 중동에 진출한 수많은 건설회사의 생존이 걸려있고 북핵 문제 등이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전쟁을 한국의 기자가 한국의 시각으로 취재했다는 점에 의미를 두고 싶다. 앞으로도 많은 사진가와 기자들이 세계의 곳곳을 찾아 그 역사의 현장을 우리 국민들과 공유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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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박5일(?)의 평양방문

<3박5일(?)의 평양방문>



2000년 8월29일부터 9월1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제2차 남북장관회담 풀사진취재기자로 다녀왔다. 31일로 예정된 귀환이었지만,박재규 우리측수석대표의 김정일국방위원장 면담으로(정부측은 태풍으로 특별기가 이륙을 못해서라고 주장했지만)하루 더 평양을 볼 수 있었다. 예정된 출발이 연기되자 31일밤 아시아나여승무원들은 고려호텔에 들어왔고,다음날 평양거리를 활보할 때는 북한주민들의 호기심어린 눈길을 한몸에 받았다.
북측안내인이나 시민들은 동아일보기자라고 소개하면 한결같이 일제때 “보천보전투”를 소개한 위대한 언론이라며 반겨줬고, 다른 회사기자들이 머쓱할 정도로 성심껏 대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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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담기간중 방북단을 위해 마련한 평양 공연단의 가극공연,매우 정교하고 몸놀림이 화려하다>  


길고긴 줄다리기 끝에 마침내 1일 밤10시가 훨씬 넘어서야 합의문이 발표됐다.박재규 통일부장관은 ‘왕고집장이’라는 별명을 들으면서까지 군사당국자회담의 개최와 이산가족 서신교환등을 골자로 한 7개항의 합의를 이끌어냈다.
굳이 평양 공동취재단의 실수라고 한다면,31일밤 10시50분경 고려호텔을 몰래 빠져나간 수석대표 박장관을 놓친 것. 박장관은 전용승용차를 바꿔타고 평양역에서 밤기차로 함북 동해안에 출장중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1일 아침식사를 하고 3시간이 넘게 대화를 나눴다.까마득히 눈치못챈 기자들은 1일 정오 생방송을 통해나오는 중앙방송을 보고서야 땅을 치며 분개. 물론 철저히 국방위원장측에서 보안속에 추진된터라 우리측 수행원들 대부분과 북측인사들도 전혀 몰랐던 것. 후회하면 뭘하나, 박장관을 호텔로비에서 저녁까지 기다린 끝에 가지고 온 사진을 부랴부랴 복사해 서울의 신문,방송에 전송할 수 밖에......
이번 취재는 풀취재였기 때문에 외신과 시사주간지에는 사진을 전송할 방법이 없었다.그러나 우리 전자신문 역사상 최초로 ‘동아닷컴’에 사진방을 만들어 외신이 다운로드해 전 세계에 타전할 수 있었다. 흔쾌히 도와주신 동아닷컴 최영록부장과 직원들에게 지면을 빌어 고마움을 전한다. 참고로 옥류관의 평양냉면과 단고기에 대한 동경이 있으시다면 버리시기를......남한의 조미료음식맛에 길들여진 우리 입맛에는 전혀 감흥이 안오니까.....

<사내보용으로 쓴 방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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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교에서

12월 2일 오후 국회 기자실...대한매일 수송부 직원이 들어오자마자 “허 참..차가 어찌나 밀리던지......서강대교에서 누가 자살소동 벌이고 있어.” “예? 자살요?”
순간 뭔가 날 끌어당기듯 망원렌즈를 챙겨 서강대교로 향했다. 평소 꼭 하고 싶어하던 취재였던 터라 잘됐다 생각했다. 상황이 아직 안끝나서인지 이미 진입로부터 차들 행렬은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동승한 한국일보 최종욱선배, 연합뉴스 도광환씨와 함께 경광등,싸이렌,전조등,비상깜박이까지 작동시키며 차숲을 헤치고 북단아치 현장까지 겨우 도착. 아치30여미터의 꼭대기에는 어떻게 올라갔는지 청년 한명이 서성이고 있었고, “정치인은 각성하라” “부정부패 청산하라”는 현수막이 걸려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사진기자의 못된 심정으로 렌즈를 그를 향해 겨냥해고, 주변의 수많은 기자들 역시 집중사격하듯 렌즈가 그를 향해있었다.

소방서 구조대원과 경찰들의 무전기 소리가 요란히 들리는 와중에 “동아일보 기자 안계십니까? 저 위에서 면담하고 싶답니다.” 타사 선후배들의 시선이 내게로 돌려졌고, “엉? 왜 하필 나야?” 생각하며“ 저..없다고 하고, 작전진행하시면 안됩니까? ”하니 구조대 반장과 경찰이 하소연하듯“협조해 주십시요”하며 안내한다.

구조반장이 나를 자세히 보더니 반갑다고 인사를 건넨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여름철 한강인명구조훈련 시범때마다 이미 친했던 마포소방서 구조반장이었다. 자살하려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쯥쯥한 기분과 가까이서 그를 취재할 수 있다는 야릇한 기분이 교차하는 사이 구조반장과 나를 태운 고가사다리는 어느새 그의 1미터 앞까지 올라가 있었다.

국회출입증과 카메라로고를 확인한 그는 안심한 듯 자기가 생각한 것을 정리한 문서라며 전달해줬다. 그리고 이수성 평통부의장과 면담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우리는 이부의장이 지방으로 출장갔다는 걸로 입을 맞췄기 때문에 만날 수 없다고 전하고 저 밑에 기자들이 모두 모여있으니 할 말을 내려가서 하자고 설득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실제 외국출장중이었다. 그는 세찬 강바람에 이미 체온이 떨어져 말도 제대로 못했고, 건장하지만 움직임도 둔해져 있었다. 그의 시선은 줄곧 여의도 국회쪽에 있었고,정치가 너무 잘못됐다고 생각해 올라오게 됐다고 밝혔다. 어느 책인지 TV에서인지 본대로 그를 최대한 안정시키려 이런 저런 말을 건냈고,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 자신을 줄로 묶는데까진 성공시켰다.
 
10분간의 대화는 끝났고, 다시 보자는 약속하고 일단은 포기하고 내려왔다. 잠시후 어떤 아가씨가 후배기자라고 왔는데 처음 보는 얼굴, 알고보니 수습기자며 오늘 처음 배치받아 회사연락받고 왔다고. 이번엔 후배까지 가세해 2차 시도. 그는 안내려간다며 완강히 버티며 친구에게 전해달라며 자기 적금통장까지 우리에게 전달했다.
구조반장, 후배기자, 그리고 필자의 칭찬,위무,설득이 계속되고..... 약 15분 지났을까.. 그는 할 말을 다 했다고 판단해서일까, 아니면 죽음이 정말 두려웠을까, 투신포기를 선언. 약간은 허탈하게 내려오니, 고맙게도 타사 선후배 기자들이 사람한명 살려냈다며 격려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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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영어는 Suicide. 라틴어의 sui(자기)와 caedo(죽인다)의 두 단어에서 나왔다. 흔히 자살자는 꼭 죽는다는 확신으로 죽는다고 하는데 심리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생사양단을 분명히 정하지 않은 채 구원받고 구조되기를 마지막 순간까지 애타게 기다린다는 것이다. 또 죽는다는 의사표시를 안하고 몰래 죽는다고 하지만, 대개 70% 전후가 주위의 친구나 가족에게 직간접적으로 눈치채게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 역시 자기의 호소를 세상사람들이 들어주기를 원했을 뿐 극단적인 최후는 원치 않았을 것이다.

마포소방서 구조대 손종한 반장(38)은 “자신의 불행이나 사회에 대한 반감을 투신으로 해결하려는 경우는 경험으로 볼 때 성공으로 끝나는 경우는 드물며 오히려 경찰서에서 호되게 조사받고 구류생활하는 소동으로 끝난다”며 “ 이런 소동이 일어나지 않는 사회상황이 됐으면 좋겠다” 고 말했다. 어쨌든 서강대교가 세워진 후 최초로 벌어진 자살기도는 오후3시에 시작돼 5시 반이 넘어 끝났다.

내려오는 고가사다리에서 본 국회는 잔뜩 찌푸린 날씨와 저녁시간으로 어스름하게 바뀌어 있었다. 3시간 반동안 극심한 정체를 겪었던 수많은 시민들은 과연 다리 꼭대기에 외쳤던 그의 외로운 절규를 들었을까? 모르겠다. 정치불신이 왜곡된 결과가 이러해야 한다면 모든 국민이 동네 다리 위에 올라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단,정치인들만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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